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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언제 어른이 될 수 있는 걸까요?

애착유형 검사와 불안정한 유형의 나(1).

하루는 모임 톡방에서 지인이 성인 애착 유형 검사 링크를 보내주면서 해보길 권한적이 있다.

 

당시 그 모임에 같이 속해있는 친구와 약속이 있던 날이었는데, 비 가 엄청나게 쏟아져서 기력이 떨어진 날이었다.

그때의 나는 거의 매일 같이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다니면서 세상에는 내 기대를 무너트리는 나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란 걸 확인하고 싶어서 나름대로 절박하기도 했었다.

아무쪼록 검사에 대한 얘기를 계속 이어나가자면, 검사 결과 회피 점수와 불안 점수가 상위 5% 이내인 불안정 애착(혼란, 공포 회피형) 유형이 나왔다. 

 

 

결과 내용에 '나는 정서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원하기는 하지만, 남들을 완전히 신뢰하거나 남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기가 어렵다. 나는 남들과 가까워지면 내가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된다.'라는 내용이 있어서 내심 충격받고 조금 울적해졌다.

이 테스트를 해보기 전까지 나는 그저 '독립적인 성향의 상처받기 싫어하는 사람.' 정도로만 나를 인식하고 있었는데, 내가 생각보다 다른 사람에 대해 확신이 거의 없는 편이며 나에 대해도 상당히 부정적인 편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씁쓸해졌다.

그저 그럴 거라고 짐작만 하고 있는 것과 막상 그런 결과를 실제적으로 받아보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서 더 그랬었다.

 

나는 항상 나에 대해서 어떤 사람인지 생각을 자주 하는 편이라서 왜 내가 이렇게 사람에 대해서 불신하게 되었는지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일단 가장 최근의 일들을 떠올려본다면 그 모임에서 알게 된 동생이 나에게 "언니랑 너무 친해지고 싶어요. 전 언니가 좋아요."하고 다가왔는데 나는 이를 마냥 기쁘게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사람은 나를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내가 좋다고 저렇게 얘기하는 걸까? 이 친구가 내게서 본모습은 나의 아주 일부분일 텐데 이 친구가 미처 보지 못했던 나의 다른 모습들을 본다고 하더라도 이 친구가 그때도 여전히 내가 좋다고 해줄까? 주로 이런 식으로 안전거리 확보를 하지 않고 급하게 친해지려고 하는 사람들일수록 빠르게 나에게서 흥미를 잃어가던데, 이 사람은 과연 안 그럴까?' 하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는 나에 대한 확신이 별로 없었고, 쉽게 떠나가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내 불안과 크게 다르지 않게 결과적으로는 이 친구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좀 더 전으로 기억을 더듬으면, 가장 최근에 그만둔 직장에 입사할 때는 입사 후 개인적인 목표가 '회사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자!'였다. 결국에는 사람이 일하는 곳이고, 업무적인 것들은 다 비슷비슷하니까 나는 이곳에서 다른 것보다는 '사람'을 얻어가고 싶었다. 때마침 전에 같은 직장에서 근무했던 지인이 그곳에서 일하면서 상당히 괜찮다는 얘기를 많이 해줘서 괜찮은 사람들이 일하는 직장에서 근무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들어갔었다.

 

처음에는 업무를 배우면서, 속해있는 사람들을 알아가면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이 직장이 나를 한 단계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시켜주리라는 확신이 있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도 무척 즐거웠다. 그저 이 직장이 굴러가기 위한 단순한 '부품'이 아닌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쨌든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이지만 빠르게 정을 줘버렸던 것 같다.

 

거쳐온 다른 직장에서 나의 태도는 항상 사람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아서 거의 마음을 주지 않고 '내가 처리해야 할 업무만 잘 하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일 했었는데 이 직장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같이 술잔을 기울이는 횟수도 잦았고, 같이 놀러 가는 날도 있어서 다른 직장들에서와는 다르게 나의 사소한 일상을 나눴다.

다른 사람은 나를 어떻게 평가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회사에 대한 애정도, 동료에 대한 애정도 커졌다. 

 

점점 성장하는 회사를 바라보며 나도 이 회사의 규모가 커지는 것에 기여하는 것 같아서 뿌듯했다.

 

 

하지만 뭐든 조직이 커지면 다른 안 좋은 점도 발생하기 마련인데 점점 일이 제시간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특히나 나는 상당한 완벽주의자여서 그런지 업무를 처리하면서 웬만하면 다른 사람이 다시 손을 쓰는 것도 싫고, 괜한 말이 나오는 것도 싫어서 한 번 일을 할 때 완벽하게 처리하려고 상당히 신경을 기울였으며 자연스럽게 예민해졌다. 근데 이 예민함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팀도, 다른 팀도 같이 예민해졌다.

 

급격하게 증가한 업무량, 제한된 시간, 환자들의 컴플레인이 사람들의 여유를 좀먹었다.

 

정신없이 일하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서로 날카롭게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목도했다. 물론 그 속에 속한 나 역시 어느덧 그런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헐뜯고 날카롭게 비판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만 욕 안 먹게 일하면 되는 거지 뭐...'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일을 했다. 저런 안일한 생각으로는 이미 비판이나 비난이 일종의 유희가 되어버린 곳에서 뒷말이 안 나오는 일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입에서 나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가 나왔을 것이란 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짐작하거나 지나가며 얼핏 듣는 것과 타인의 입을 통해서 직접 전해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내가 마음을 주었던 사람들에게서 나온 날것 그대로의 비난은 그대로 나에게 와서 감당할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마음 깊은 곳에 큰 생채기를 냈다. 오래간만에 지독한 자기혐오와 불신을 겪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언제 어디서 또 무엇으로 괜한 꼬투리가 잡힐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때의 나는 몰랐었지만 많이 불안했었나 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불안'이라는 감정에 절여지고 있었다.

 

지독한 불면증으로 인해 단 1초도 잠들지 못하고 출근하는 날들이 잦아졌다.

수면의로 인해 컨디션이 저하되는 날이 급격하게 많아졌고, 그럴수록 업무 능력은 떨어졌다.

오늘은 꼭 잠들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인해 불안이 더 심해졌다.

급한 대로 내과에서 수면유도제를 처방받았지만 몽유병이 생기거나,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약을 복용해도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늘었다.

다른 약으로 바꾸고 나서는 그나마 잠에 들 수 있었으나 잠에서 깨면 머릿속이 몽롱하고 늘 무거웠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났고 나는 심각한 불면증에 삶에 대한 의욕이 떨어지고 삶의 질도 떨어졌다.

 

 

출근길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퇴근길에 사람이 많은 지하철을 타면 이대로 질식해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덮쳐왔고, 일을 하다가도 문득 이 공간에서 얼른 뛰쳐나가야겠다는 충동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았다.

정상적으로 숨을 쉬고 있었지만 늘 숨이 모자랐다.

온통 수초로 가득 덮여서 햇빛도 안 들어오는 고여있는 산소 포화도가 낮은 연못 속의 물고기가 된 느낌이었다. 숨을 쉬러 연못의 표면으로 기운 없이 올라왔지만 늘 산소가 부족해서 좌절하고 다시 침잠하는 느낌이었다.

죽을 용기는 없었지만 상당히 우울하고 절망스러웠다. 그와중에 우울하면 우울할수록 간절히 살고 싶었다.

제발 내가 내 삶을 놓아버리지 않기를... 전에 누리던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 싶다고, 평범한 나로 돌아가고 싶다고 잠이 오지 않는 밤 항상 빌었다.

 

 

이대로 일을 하다간 정말 죽을 것 같을 때 병원을 예약했다. 혹시 몰라서 며칠간 약을 중단하고 병원에 방문했고 3일간 거의 잠을 제대로 자지 못 한 채 수면다원 검사를 받았다. 결과적으로는 의학적인 수면을 보통 사람보다 잘 취했다는 결과를 받았다.

병원에서 시행한 여러 가지 검사 결과를 보니 나의 불면증은 심각한 불안장애(최고점 수준이라고 말씀하셨다.)가 원인이었다. 그전까지는 내가 불안해한다고 인식하지 못했는데 천천히 열이 오르는 물속에 있던 개구리처럼 그렇게 불안에 몸과 정신이 익어갔던 것이었다.

 

병원에 다니면서 불안장애, 우울증, 불면증, 광장 공포증, 공황장애, 부신피로증후군을 진단받았다.

 

자율신경계 검사를 보고서 쉽게 말하면 번아웃이 온 것이라 말씀해주셨다. 극심한 스트레스 상태에 너무 노출이 오래되어있어서 더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 상태라고 하셨다. 사자 같은 맹수를 만나는 극한 상황이 아니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안 나올 만큼 지쳐있는 상태라는 말씀을 듣고 기분이 가라앉았다. 내 자율신경계 상태가 흡사 80대 노인가 같다는 말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아직 30대 초반인데 앞으로의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있는 것일까?' 하는 공포감이 들었다.

 

매사에 계획적인 내가 마비됐다. 앞이 캄캄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슨 계획을 세워야 하는지 답을 알 수 없었다. 끝없는 망망대해에 내던져진 듯한 막막함이 내 눈을 가렸다.